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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얼굴들

책장을 비워야겠다

올 겨울은 유독 추웠는데, 이제 진짜 봄이 온 것 같아서 옷장과 책장을 정리했다.

2년 간 입지 않았던 옷은 따로 모았다. 당근마켓에 올리려고. 중고서점에 팔 책들도 책장에서 골라냈다.

그중엔 5년째 펼치지 못한 책들도 있었다. 이제는 너무 낡은 이야기여서 팔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책들.

 


 

나는 2015년 쯤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당시 시 문단은 매우 활기 넘치는 분위기였는데, 그 활력의 중심엔 '그들'이 있었다. 모든 문예지 속 비평과 서평은 이들을 환대하는 글로 넘쳐났다. 습작생이었던 나 또한 그들의 이야기를 먹으며 무럭무럭 자라나는 꿈을 꾸곤 했다. 이렇게 이상하고 축축한 세계가 있구나. 그 세계에 초대받고 싶다. 그 놀이에 참여하고 싶었다.

 

시를 쓰면서 나는 그들의 행동과 목소리를 자주 흉내 냈다. 어떻게 하면 나의 평범한 세계를 부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 당시 나처럼 습작을 하는 친구들과 합평을 하면 대개가 그런 언어를 흉내 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보여주는 언어적 실험과 놀이는 꽤 세련되게 느껴졌고, 그때 나에게 현실을 이야기하는 건 조금 촌스런, 진부한 어떤 것처럼 느껴졌다. 가능하면 현실에서 가장 멀리 벗어나고 싶었다. 거기서 등장한 이상한 얼굴들의 일탈을 표현하고 싶었다. 영감, 우울과 일탈, 천재적 자아. 이런 것들이 아름답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2016년 말, 해시태그 #00계_내_성폭력 고발이 이어졌다. 문단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투와 함께 언급된 피의자들의 이름이 내 책장에 참 많이도 꽂혀 있었다. 그 책등을 보며 이 이야기들을 이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생각했다. 그때 그들의 이상한 언어를 흉내 내면서 내가 쓰고자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그 기표들을 통해서 나는 무엇을 읽고 싶었던 걸까. 대체 나는 '시'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는다. 생계도 급했지만, 내가 쓰는 언어 또한 어느새 그들의 자폐적인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어떤 텍스트들은 읽을 수가 없다. 그때는 멋있었는데, 지금은 어쩐지 너무 찌질한 이야기. 그때는 아름다웠는데, 지금은 폭력이 된 이야기. 이후에도 문단의 시스템은 쉽게 바뀌지 않았고, 조치는 매우 느렸다. 

 


 

책장을 비워야겠다. 과거의 불편한 문학과 결별하며, '참고문헌 없음'을 알리는 싸움과 연대의 텍스트들이 꽤 많이 쌓였다. 내 책장에도 더 많은 공간이 필요할 것 같다. 

 

페미니즘 출판사 봄알람과 여성 문인들이 함께한 『참고문헌 없음』은 #문단_내_성폭력에 대한 싸움과 연대의 기록이자, 그 피해자를 지지하는 출간 프로젝트이다. 제작비와 유통비를 제외한 이 책의 인세와 수익은 #문단_내_성폭력 관련 법률 비용과 의료비 및 관련 비용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미지 출처: 『참고문헌 없음』 텀블벅 페이지 (tumblbug.com/baumealam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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