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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얼굴들

1개의 이야기, 99개의 문체

레몽 크노의 『문체 연습』

 

 

원래 책을 구매하면 띠지는 버린다. 어차피 대개가 마케팅 워딩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XXX 매체에서 선정한 올해의 책', '아무개 작가의 추천 도서' 등등. 표지에서 기어이 확장해 만든 띠지의 목적은 순전히 후킹과 판매에 있는 듯하다. 구매했다면 그 필요는 사라진 셈이다. 

 

『문체 연습』의 띠지는 내가 버리지 않는 첫 띠지였다. 레몽 크노의 다양한 이 표정 모음이 이 책의 띠지인데, 으엑, 푸하, 읭?, 하, 뜨악, 등등의 표정짤이 그 어떤 카피보다 이 책을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1개의 이야기를 99개의 문체로 말한다. 먼저 그 1개의 이야기는 화자가 만원 버스에서 만난 한 남자를 우연히 광장에서 다시 마주친다는 내용이다. 일종의 디폴트 값인 이 문장들을 그는 '영어섞임투'로 말하거나 '뒤가 사라'지고, '앞이 사라'지는 문체로 말한다. 혹은 '미쿡 쏴아람임뉘타' 문체나, '동요식'. '소네트식'의 문체로 말한다. 

 

#영어섞임투

원 데이, 미드데이에, 버스 테이크한 나, 그뤠잇 롱 목덜미 위, 레알 스튜핏 페이스에 로프 두른 팰트 캡을 저스트 원 쓰고 있는 영맨을 룩킹중이었어. 패신저들이 버스 인사이드로 업! 다운! 업! 하던 에브리타임, 컨퓨전이 클라이맥스에 올랐을 때, 오, 지저스 크라이스트! 젠틀맨이 인텐셔널리 자기 풋을 스텝했다고, 이 크레이지 영맨, 왓 더 퍽! 컴플레인하더니, 언오큐파이드 시트를 향해 런닝을 퀵클리하게 하더라고.(p.97)

 

#부정해가며

배도 아니고, 비행기도 아니고, 지상의 운송 수단이었다. 아침도 아니고, 저녁도 아니고, 정오였다. 아기도 아니고, 노인도 아니고, 청년이었다. 리본도 아니고, 끈도 아니고, 배배 꼰 장식줄이었다. 줄서기도 아니고, 실링이도 아니고, 떠밀림이었다. 친절한 사람도 아니고, 고약한 사람도 아니고, 성마른 사람이었다. 사실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고, 핑계였다. 서 있는 자도 아니고, 쓰러진 자도 아니고, 앉아서 존재하기를 바라는 자였다.(p.29)

 

하나의 이야기를 뒤집거나 흔들거나, 마사지하면서 반복하고 변주하는 이 언어 놀이를 따라하고 싶어졌다.

 

나는 아침 7시에 일어나 9시 반에 출근을 한 뒤, 12시 반에 점심을 먹고 오후 업무를 한다. 그리고 6시 반에 퇴근한다. 집에 도착해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저녁을 먹은 뒤, 휴대폰 화면을 보다가 12시쯤 잠든다. 고양이랑 같이.

 

이 반복적인 일상을 레몽 크노식으로 어떻게 변주할지 고민 중이다. 어떤 날에는 점심에 집에서 만든 야채 카레를 사람들과 나눠 먹거나, 어떤 날에는 30분 일찍, 6시 반에 일어나 조금 여유로운 오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날에는 약간 낯선 옷을 입고 조금 이상한 느낌을 시도해 볼 수도 있다. 일단 오늘은 '처음으로 블로그에 뭐라도 끄적여보는'의 변주를 시도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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